未完 Jiyu

For 큰 눈과 환한 웃음을 가진 꼬마 아가씨 5cm,


너는 눈을 반짝이며 얘기했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칠듯한 욕망에 휩싸일 때가 있잖아. 그런데 서로 그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불과 불이 만나듯 확 타올랐으면 좋겠어. 모든 걸 다 태워버릴 것처럼, 그게 찰나일지라도 ‘연소’라는 걸 해봤으면 좋겠어.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해주었어.


희망사항이라 치더라도 너무 거창한 걸, 꼬마 아가씨. 예전에 그래프 하나를 본 적이 있지. 남녀의 애정곡선이랄까, 유치하지만 교과서보다 정확했어. 두 개의 곡선들은 마치 배배꼬인 DNA 사진 같았어. 하나는 올라가는데 다른 하나는 아직 올라올 생각을 안 하고 있고, 다른 하나가 겨우 올라갈라 치면 먼저 올라갔던 하나는 내려오기 시작하지. 마치 상극의 자석을 갖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남녀의 사랑이란 그런 거야, 아가씨. 희망은 좋지만 그게 기대가 되면 곤란해. 상처받을 테니까.


너는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 난 마음이 아팠지만 비겁하게도 못 본 척 하면서 창밖을 바라봤어. 넌 계속 입을 삐죽거리면서 휴지에 낙서를 했어. 내가 말했던 그 곡선들을 그리면서 ‘아이참, 아이참, 왜 이게 따로 노느냔 말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지. ‘애초에 두 개가 다른 선인 이상 따로 놀 수밖에 없지’라고 덧붙여줄까 하다가 참았어.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질까 봐서.


한참을 낙서만 하던 넌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어.


이것 좀 봐. 이렇게 간단한 걸. 희망을 가진 사람 눈에만 보이는 답이야. 잘 봐, 두 개의 선이 만나긴 하잖아. 위로 아래로 각자 움직이면서도 만나는 시점은 분명 존재한다고. 따로 노는 듯 하지만 사실은 만날 지점을 찾으려고 같이 움직이는 거야.


참아야지, 참아야지 했지만 나는 또 입을 열어버렸어.


아가씨는 바보야, 그대는 ‘완전 연소’를 얘기했잖아. 네가 마킹한 그 지점은 너무 높이가 낮아. 그 정도 온도로 완전 연소가 가능하겠니? 미적지근함과 헷갈릴 정도의 따뜻함 정도만이 존재할 뿐이야. 두 점이 만난다? 그래,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각자의 최고점에서 만날 수는 없어. 최고치의 욕망을 가라앉히고 누르고 억지로 서로 양보해서 접점을 찾으면 뭐해. 겨우 만났다고 웃고 있어도 불만과 불안은 커져만 갈 걸. 한 쪽은 이젠 너무 뜨거워서 부담스럽다는 불만에, 다른 한 쪽은 아직도 덜 데워진 것 같다는 불만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둘을 모두 언제쯤 다시 접점을 벗어나버리게 될까 불안해서 자꾸만 심호흡을 하게 될 거야. 네가 말하는 완전 연소가 이런 건 아니지?


예상대로 넌, 다시 고쳐서 낸 과제를 또 퇴짜 맞은 어린 아이처럼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어. 미안해- 말할까 하다가 난 또 입을 다물어버렸어. 이놈의 입은 왜 만날 닫아야 할 땐 열리고 열어야 할 땐 닫혀버리는 걸까. 그런데 또 미안한 일은 아닌 게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이 꼬마 아가씨는 좀처럼 자라질 않아서, 쓰지만 좀 강력한 영양제가 필요할 듯도 했거든. 무서운 의사선생님 역은 내가 맡아야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너는 히끅히끅 하면서 겨우 말했어.


그냥 줄을 양 쪽에서 확 당겨서 평평하게 만들어버리면 안 돼? 그런 힘이 작용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인력을 가진 서로가 만나면 가능하잖아.


이번에도 내 입은 주제를 모르고 열려버렸지.


꼬마 아가씨, 그런 사람 만난 적은 있어? 본 적도 없지? 순수한 건 좋지만 순진한 건 곤란해.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이는 여자아이는 아예 울려버리고 싶은 게 그 여자애를 짝사랑하는 사내아이의 심리랄까. 아니, 별로 그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넌 이제 대놓고 울겠지. 그럼 난 또 대충 휴지나 손수건을 집어서 눈물을 닦아주고 달달한 코코아나 케이크를 내밀면서 어르고 달래서 집에 보내겠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처음으로 빗나갔다. 꼬마 아가씨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따지듯 물었다.


당신한테 난 뭐야?


아,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꼬마 아가씨는 이제 더 이상 꼬마 아가씨가 아니구나. 크고 반짝반짝 거리기만 했던 눈은 어느 새 나를 가득 담을 만큼 깊어져 있었다. 아이처럼 까르르 웃거나 아니면 토라질 줄 밖에 몰랐던 표정도, 어느 새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조금 화난 듯도, 조금 슬픈 듯도, 조금 아픈 듯도 한 그 알 수 없는 표정. 여인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이제 코코아나 케이크로는 달래줄 수 없겠구나.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에 물든 밤색 머리칼, 길고 하얗게 뻗은 목과 앙 다문 입술. 예상대로 예쁘게 컸구나, 꼬마 아가씨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꼬마 아가씨라면 한 번 쥐어박고 말 텐데, 눈앞의 이 숙녀는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너무 많이 자라있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입은 왜 열리질 않지. 그 어렵고 잘난 척 하던 말들을 할 땐 멋대로 잘도 열리더니.


뭐긴 뭐야. 코코아 마실래? 딸기 케이크 주문할까?


눈앞의 여인은 더 이상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단호하게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 속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말했던 거대한 인력이 자꾸 내 끈을 잡아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샌가 정말 간신히 그 힘에 버티고 있었다. 이걸 놓는 순간 나는 모든 게 화르륵 하고 타버리지는 않을까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코코아도, 딸기 케이크도 필요 없으니 빨리 끈을 잡고 있는 손을 놓기만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안 돼, 다 타버릴 것만 같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건지 기대감과 짜릿함에 황홀해하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촛불은 완전히 다 타기 전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넘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던가. 타게 내버려둘까 하니 너무 무섭고, 도망갈까 하니 너무 안타깝고. 정말 꼬마는 나였던 건가. 하나도 성숙하질 못했구나.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약함과 한심함 그 모든 것들을 지닌 스스로에 대해서. 그래서 나는 크게 타오르려던 촛불에 물을 끼얹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팽팽하게 당겨지려던 나의 끈을 가위로 뚝 끊어버렸다. 그래서 그래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끈과 나의 끈이 하나로 합쳐지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나약하리만큼 얇아 비틀어지고 더러운 끈과 저 빛나는 오색실이 어떻게 하나로 만나 타도록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 인간이었구나. 심술궂은데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존재, 신이시여. 이 하나만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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