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꽃소리 Jiyu

봄 사이 피고 지는 꽃이라면 모두 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들 흩날리는 모습에 웃고 우는지


샛노란 개나리는

삼삼오오 까르르 아가들 웃는 소리에

분홍빛 진달래는

밤새도록 설레는 소녀들 심장 소리에

눈발 같은 벚꽃은

흰 베일 속 속삭이는 연인들 사랑 소리에

흐드러지게 피어오르던 찰나


달빛보담도 밝던 목련은

보다 눈물짓는 울 엄마 섧은 소리에

흰머리 살살 긁던 민들레는

똑 닮은 울 할매 짐 한 숨 내리는 소리에

흐드러지게 지고 마는 찰나


봄 사이 피고 지는 꽃이라면 모두 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들 흩날리는 모습에 웃고 우는지


전부 다 알면서도 매년 살짝 왔다 또 갔다

전부 다 아는 모양으로

웃음 흐드러지게 피우고

눈물 흐드러지게 감추고

봄마다 또 그렇게 세상에 흩날리더라지


Y 5cm

있잖아 Y 보고 싶어

 

이렇게 누군가 쓸고 간 자리엔

항상 네가 차올라

네 손은

네 입술은

네 품은

나를 위로해

 

아니... 

너는 나를 살게 해

 

그날

그곳

그 공기

습기

냄새

불빛

거리

눈감으면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

 

Y,

나는 아직

메여있어

그 시간에

그 공기에

그 거리에

 

Y,

나는 아직

메여있어


未完 Jiyu

For 큰 눈과 환한 웃음을 가진 꼬마 아가씨 5cm,


너는 눈을 반짝이며 얘기했어.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정말 참을 수 없을 만큼 미칠듯한 욕망에 휩싸일 때가 있잖아. 그런데 서로 그 타이밍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져서 불과 불이 만나듯 확 타올랐으면 좋겠어. 모든 걸 다 태워버릴 것처럼, 그게 찰나일지라도 ‘연소’라는 걸 해봤으면 좋겠어.

나는 시큰둥한 얼굴로 대답해주었어.


희망사항이라 치더라도 너무 거창한 걸, 꼬마 아가씨. 예전에 그래프 하나를 본 적이 있지. 남녀의 애정곡선이랄까, 유치하지만 교과서보다 정확했어. 두 개의 곡선들은 마치 배배꼬인 DNA 사진 같았어. 하나는 올라가는데 다른 하나는 아직 올라올 생각을 안 하고 있고, 다른 하나가 겨우 올라갈라 치면 먼저 올라갔던 하나는 내려오기 시작하지. 마치 상극의 자석을 갖다 놓기라도 한 것처럼. 남녀의 사랑이란 그런 거야, 아가씨. 희망은 좋지만 그게 기대가 되면 곤란해. 상처받을 테니까.


너는 곧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지. 난 마음이 아팠지만 비겁하게도 못 본 척 하면서 창밖을 바라봤어. 넌 계속 입을 삐죽거리면서 휴지에 낙서를 했어. 내가 말했던 그 곡선들을 그리면서 ‘아이참, 아이참, 왜 이게 따로 노느냔 말야’ 하는 모습이 안쓰러웠지. ‘애초에 두 개가 다른 선인 이상 따로 놀 수밖에 없지’라고 덧붙여줄까 하다가 참았어. 그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질까 봐서.


한참을 낙서만 하던 넌 갑자기 뭔가 발견한 듯 내 옷소매를 잡아당겼어.


이것 좀 봐. 이렇게 간단한 걸. 희망을 가진 사람 눈에만 보이는 답이야. 잘 봐, 두 개의 선이 만나긴 하잖아. 위로 아래로 각자 움직이면서도 만나는 시점은 분명 존재한다고. 따로 노는 듯 하지만 사실은 만날 지점을 찾으려고 같이 움직이는 거야.


참아야지, 참아야지 했지만 나는 또 입을 열어버렸어.


아가씨는 바보야, 그대는 ‘완전 연소’를 얘기했잖아. 네가 마킹한 그 지점은 너무 높이가 낮아. 그 정도 온도로 완전 연소가 가능하겠니? 미적지근함과 헷갈릴 정도의 따뜻함 정도만이 존재할 뿐이야. 두 점이 만난다? 그래, 그럴 수 있어. 하지만 각자의 최고점에서 만날 수는 없어. 최고치의 욕망을 가라앉히고 누르고 억지로 서로 양보해서 접점을 찾으면 뭐해. 겨우 만났다고 웃고 있어도 불만과 불안은 커져만 갈 걸. 한 쪽은 이젠 너무 뜨거워서 부담스럽다는 불만에, 다른 한 쪽은 아직도 덜 데워진 것 같다는 불만에 잠을 이루지 못하겠지. 둘을 모두 언제쯤 다시 접점을 벗어나버리게 될까 불안해서 자꾸만 심호흡을 하게 될 거야. 네가 말하는 완전 연소가 이런 건 아니지?


예상대로 넌, 다시 고쳐서 낸 과제를 또 퇴짜 맞은 어린 아이처럼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어. 미안해- 말할까 하다가 난 또 입을 다물어버렸어. 이놈의 입은 왜 만날 닫아야 할 땐 열리고 열어야 할 땐 닫혀버리는 걸까. 그런데 또 미안한 일은 아닌 게 내가 틀린 말을 한 건 아니니까. 이 꼬마 아가씨는 좀처럼 자라질 않아서, 쓰지만 좀 강력한 영양제가 필요할 듯도 했거든. 무서운 의사선생님 역은 내가 맡아야지.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프지.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는데.


너는 히끅히끅 하면서 겨우 말했어.


그냥 줄을 양 쪽에서 확 당겨서 평평하게 만들어버리면 안 돼? 그런 힘이 작용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인력을 가진 서로가 만나면 가능하잖아.


이번에도 내 입은 주제를 모르고 열려버렸지.


꼬마 아가씨, 그런 사람 만난 적은 있어? 본 적도 없지? 순수한 건 좋지만 순진한 건 곤란해.


울 것 같은 표정을 보이는 여자아이는 아예 울려버리고 싶은 게 그 여자애를 짝사랑하는 사내아이의 심리랄까. 아니, 별로 그러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넌 이제 대놓고 울겠지. 그럼 난 또 대충 휴지나 손수건을 집어서 눈물을 닦아주고 달달한 코코아나 케이크를 내밀면서 어르고 달래서 집에 보내겠지 생각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처음으로 빗나갔다. 꼬마 아가씨는 전혀 울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따지듯 물었다.


당신한테 난 뭐야?


아, 나는 말문이 막혀버렸다. 꼬마 아가씨는 이제 더 이상 꼬마 아가씨가 아니구나. 크고 반짝반짝 거리기만 했던 눈은 어느 새 나를 가득 담을 만큼 깊어져 있었다. 아이처럼 까르르 웃거나 아니면 토라질 줄 밖에 몰랐던 표정도, 어느 새 뭐라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것들을 담고 있었다. 조금 화난 듯도, 조금 슬픈 듯도, 조금 아픈 듯도 한 그 알 수 없는 표정. 여인만이 지을 수 있는 표정. 이제 코코아나 케이크로는 달래줄 수 없겠구나.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햇빛에 물든 밤색 머리칼, 길고 하얗게 뻗은 목과 앙 다문 입술. 예상대로 예쁘게 컸구나, 꼬마 아가씨는.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꼬마 아가씨라면 한 번 쥐어박고 말 텐데, 눈앞의 이 숙녀는 내가 눈치 채지 못한 사이에 너무 많이 자라있었다.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입은 왜 열리질 않지. 그 어렵고 잘난 척 하던 말들을 할 땐 멋대로 잘도 열리더니.


뭐긴 뭐야. 코코아 마실래? 딸기 케이크 주문할까?


눈앞의 여인은 더 이상 평소처럼 고개를 끄덕여주지 않았다. 단호하게 내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내 마음 속의 끈이 팽팽하게 당겨지려는 것을 느꼈다. 그녀가 말했던 거대한 인력이 자꾸 내 끈을 잡아당기려고 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샌가 정말 간신히 그 힘에 버티고 있었다. 이걸 놓는 순간 나는 모든 게 화르륵 하고 타버리지는 않을까 심장이 마구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눈은 코코아도, 딸기 케이크도 필요 없으니 빨리 끈을 잡고 있는 손을 놓기만 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안 돼, 다 타버릴 것만 같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건지 기대감과 짜릿함에 황홀해하고 있는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촛불은 완전히 다 타기 전에 이런 기분이었을까.


넘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렇게 그릇이 작은 사람이었던가. 타게 내버려둘까 하니 너무 무섭고, 도망갈까 하니 너무 안타깝고. 정말 꼬마는 나였던 건가. 하나도 성숙하질 못했구나.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나약함과 한심함 그 모든 것들을 지닌 스스로에 대해서. 그래서 나는 크게 타오르려던 촛불에 물을 끼얹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팽팽하게 당겨지려던 나의 끈을 가위로 뚝 끊어버렸다. 그래서 그래프는 애초에 없었던 것이 되어버렸다. 그녀의 끈과 나의 끈이 하나로 합쳐지다니, 그건 안 될 말이다. 나약하리만큼 얇아 비틀어지고 더러운 끈과 저 빛나는 오색실이 어떻게 하나로 만나 타도록 내버려둘 수 있단 말인가. 그래도 내가 일말의 양심은 남아있는 인간이었구나. 심술궂은데다 이해하기도 어려운 존재, 신이시여. 이 하나만은 감사합니다.


역사의 행간(行間)에서 일상을 읽다 Jiyu

‘행간(行間)을 읽어야 참뜻을 안다’라는 말은 역사를 읽을 때도 유효하다. 대부분의 역사는 민중의 ‘일상’을 그리지 않는다. 승자의 관점에서 파격적인 ‘비일상(非日常)’을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보려면 비일상이 쓰인 행간에서 일상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그 아무 것도 없을 것 같은 일상의 그림자를 들여다보는 수고까지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역사를 생각하는 일’은 매우 까다롭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강준만은 「한국 근대사 산책」에서 ‘일제 강점기 첫 날의 조선인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일상을 잃지 않았다’라고 표현했다. 언뜻 이 문장만 보면 그들의 무관심에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사료(史料)의 행간과 그림자를 읽으면 그들의 일상이 얼마나 비정상적인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분노의 대상은 서민들이 아니라 다른 이들이 되어야 함을 이내 깨닫게 된다.

사실 ‘일상다반사(日常茶飯事)’만큼 조선 백성들에게 어려운 일도 없었다. 다반사는 불교의 항다반사(恒茶飯事)에서 유래한 말로, 차를 마시거나 밥을 먹는 등의 아주 손쉽고 평범한 일을 일컫는다. 요즘 우리는 일상에 다반사 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조선 백성들은 다반사를 하기 위해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일상을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하루 한 끼를 챙기기도 힘든 그들에게 일제 강점기의 첫 날은 그저 삶의 착취자가 바뀐 날에 불과했다. 이전에는 부패한 탐관오리들에게 일상의 다반사를 바쳤다면, 그 날부터는 일본인들에게 바친 것일 뿐이었다.

서민들이 먹고 살기에 바빠 ‘일상’을 잃지 않았다면, 넉넉했던 양반들은 또 무슨 이유로 집 안에 앉아 일상다반사를 고수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들은 겁이 났던 것이다. 일본이 나라를 지배하게 되었으니 신분제는 사라질 텐데, 밖에 나가면 그 동안 맘 놓고 괴롭혔던 ‘상놈’들이 예전처럼 깍듯이 대해주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민들과는 달리 참 ‘사소한 이유’로 국가가 치욕을 당한 첫 날부터 쭉 밖에 나가 돌멩이 하나 던지지 못하고 일상에 열중했다.

결국 후에 백성들과 가난한 지식인들이 일상도 포기한 채 먼저 태극기를 들고 거리로 나와 세계에 독립 의지를 알렸다. 역사 교과서에는 ‘사람들이 거리에 나와 만세운동을 벌였다’라고만 간략히 쓰여 있다. 그러나 그 문장들 사이의 여백에는 오랜 세월 단 한 번도 맘 편히 일상다반사를 누리지 못했던 서민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어쩌면 그 날 일상을 포기하고 거리에 뛰어든 민중의 외침 속에는 일본에 대한 분노뿐 아니라 지배층에 대한 원망과 실망도 섞여있었는지 모른다. 혹시 그 날이 한평생 착취에만 시달려 한을 품은 그들이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시도한 ‘비일상’은 아니었을까.


신선의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차(茶) Jiyu

선다일여(禪茶一如), 차를 마시면 신선의 경지에 이른다는 말이다. 천년을 아울러 우리 선인들에게 차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라 하나의 문화였다. 어쩌면 차 문화 자체가 하나의 위대한 발명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만의 전통 차 문화인 다례(茶禮)에서는‘오감으로 마시는 차’를 최고로 꼽았다. 영롱한 찻물 소리, 은은한 향과 아름다운 빛깔, 그리고 담백한 맛과 따뜻한 찻잔의 감촉을 함께 느끼는 순간 다도(茶道)가 완성된다고 한다. 신선계의 문이 열리는 순간이다.


물론 차 문화는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은 아니다. 영국에는 시간대에 따라 마시는 차만 해도 열 가지에 달한다. 아이스티를 처음 만든 미국과 세계 최대의 차 생산국인 인도도 차를 아끼는 나라들이다. 한편, 과채(果菜)가 부족하여 차로 영양을 채우는 러시아나 티베트, 모로코에서는 하루 양식은 없어도 되지만 차 없이는 못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가까운 나라인 중국과 일본은 아예 차의 종류를 헤아리기도 어려울 정도다. 이렇듯 차는 여러 나라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특히 사람과 사람 간 ‘만남’의 필수요소로 자리하고 있다. 손님에게 더 따뜻하게 데운 차를 대접하기 위해 자기 잔을 먼저 채우고 손님 잔을 나중에 채우는 우리나라의 다례처럼 각 나라에는 저마다의 만남 속 다도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차 문화에는 다른 나라의 것과 구별되는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일상 속 사색을 허락하는 시간과 공간의 상징물로서 차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다도는 허례허식보다 내면의 진중함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채다(採茶, 찻잎을 따는 일)의 시기와 찻물의 선택, 그리고 제다(製茶, 차를 만드는 법)와 끽다(喫茶, 차를 음미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정성을 다하면서도 소박함과 간결함을 기본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이 스스로의 품성을 닦는 수신(修身)과 연결되었다. 타인과의 만남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만남에서도 우리 선인들은 차를 곁에 두고 사랑했다. 특히 가난함을 편하게 여기고 도를 배우는 즐거움을 최고로 생각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에게는 차를 다려 마시는 일이 곧 도덕과 예의를 실천하는 것과도 같았다.


웰빙 열풍이 불면서 차에 대한 관심도 다시 커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재발견해야 할 부분은 물질적인 것으로서의 차가 아니라, 문화와 혼이 담긴 차다. 차가 선인들의 위대한 발명품인 이유는, 각종 효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감각과 사색의 혼을 그 속에 포용할 수 있는 덕분이다. 사치스럽기보다 소박하고, 마시는 데 급급하기보다 사색하는 데 여유로울 수 있을 때 비로소 타국의 차만을 사대하는 우둔함에서 벗어나 우리 고유의 발명품인 차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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